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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카톨릭

로마 주교는 도나투스의 자리에 카르타고의 한 주교를 임명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카셀리안 (Cacealian)이었습니다.

 

양 측의 계속된 알력 속에서도 이 들이 콘스탄티누스 에게 호소할 정도로 그의 위신은 높았습니다. 그의 지지를 누가 더 받든 그 이상 싸움은 없을 것 이라고 서로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로 부터 후원을 받으려는 이런 시도 결과,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처음으로 분파와 비 정통 행위가 세속 법으로 처벌받는 죄가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정통이라고 할 수 있는 자는 누구나 이 세속의 갑옷을 마음대로 걸쳐 입고서 이 새로운 정통의 기준과 달리하는 자들에 대하여 행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카켈리안의 편을 들기로 작정 했습니다. 카르타고 대중은 로마 지방 총독의 집무실 주변에 모여 카켈리안을 성토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들 행동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으나, 오히려 로마 주교 밑에서 양측 입장을 청문하도록 호민관을 지정하였습니다.

 

도나투스는 불참하였으며, 어느 누구도 그 사건을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재 중 그에게 불리한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아프리카의 사도 교회에서는 로마 주교 쪽에만 유리 한 판결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소송 당사자들처럼 하나님의 사제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 라고 콘스탄티누스는 분개 하였습니다. 이런 실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른 법정을 아를레스(Arles)에 세웠습니다.

 

 

 

양측은 서로 다른 길을 지나 그곳에 도착하라고 명령하였는데, 청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일어날지 모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이였습니다. 도나투스 측이 또 다시 패했습니다.

 

판결은 “주교들이 권위나 전통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위험한 인물들을 잘 다루었다. 그 자들은 저주받기에 마땅했다.”고 내려졌습니다.

 

 

 

이것은 이전 판결처럼 북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이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세대 동안 기독교인들은 그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왔으며, 그들을 사탄의 밀사로 생각했습니다. 전에는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는데, 이제는 기독교인의 바른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 다른 박해를 받았습니다. 북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관리가 하룻밤 사이에 신의 종복이 되어 로마에 있는 바울 교회 주교의 권한을 강화하고 있는 일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까지 도나투스는 그들의 주교였으며, 이제 유명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저명한 인사에 대하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가 쓴 책들과 귀중한 필사본 사서를 모두 로마 군인들이 태워 버렸습니다. 이런 행위가 이교도 황제의 도움을 받아 이제 힘과 관록을 키워 나가기 시작하는 로마 기독교회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배경, 용모, 친구들, 그리고 생애 중에 일어난 일 등에 관해 거의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도나투스는 훌륭한 웅변가요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그가 어디를 가던 사람들이 크게 열광하여 그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당시를 기억하였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흰 머리’에 걸고 맹세하고는 했습니다. 올바르게 처신한다면 현세와 내세에서 다 성공하리라고 확신한 세속적 성직자에 맞서 그는 그들을 일반 대중의 혐오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성실성은 친구와 적 모두가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카르타고 교회를 수렁에서 구해 준 종교 개혁자로 알려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기적을 행하는 자, 또한 다니엘 보다 더 현명한 성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좀 먹고 변질시키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 단단한 바위처럼 굳세게 대항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양 교회에 서한을 보내 상호 대립을 불식하여 자신이 선택한 교회 아래 뭉치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이 서한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어떤 형태이든 교회보다 우위에 두고 있었으며, 예수께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으므로 한 층 더 주목이 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그 서한은 어느 쪽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아를레스에서 재판 결정에 따른 시행도 없었습니다.

 

 

 

서기 315년 7월 황제는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북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프랑크족의 침입을 진압하러 밀라노에로 갔습니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아프리카에 위원회를 보내 그곳 상황을 잘 살피고 분쟁을 해결하라고 명령 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원회는 도착한 뒤 바로 배척을 당했으며, 또 격렬한 폭동이 일어나 아무 성과 없이 이탈리아로 돌아 와야만 했습니다.

 

 

 

서기 316년 콘스탄티누스는 이 소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자신이 직접 북아프리카에 가서 어떻게 최고 신을 숭배해야만 하는지를 정확하게 판정 내려야 하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런 판결을 내릴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 한 자체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양 교회측에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결론 지었습니다:

 

 

 

나의 끊임없는 실천과 그리고 황제직에 합당하게 실수를 일소하고 무분별한 의견을 없앤 다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사람들을 함께 모아 토론하게 하여 진실의 종교와 소박한 생활을 따르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당연한 경배를 드리게 하는 일뿐이다.

 

 

 

예수 본보기를 잊거나 무시하고 난 뒤에야 ‘진리의 종교’가 여론의 대상이 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자신 외에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 했습니다. 이런 태도를 갖고 기독교에 접근하여 자기가 추종하지도 않는 종교의 내정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기가 교회 지도자보다 더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보통 사람이라기보다는 신의 대리인 정도로 자신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를레스 재판정에 참석했던 바울 교회의 주교들은 콘스탄티누스 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의 궁리가 ‘성령과 천사들의 입회 아래’ 기록되었노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통치가 무시당하자 황제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콘스탄티누스는 계획했던 대로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도나투스파는 매우 강대하므로, 도나투스와 카켈리안의 싸움에 직접 개입하는 일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전했습니다.

 

개인으로서 개입하는 일이 실패로 끝날 경우, 그의 위신이 크게 손상을 입을 것이었습니다. 대신, 도나투스를 경멸하고 ‘적절하게 최고신을 숭배하는 이점에 관심을 보인 포고령을 선포했습니다

 

 

 

. 이 포고령이 무시당하자 ‘가장 강력한 법’을 아프리카에 하달하였으니, 도나투스 파의 교회를 몰수하고 그 지도자들을 추방하라는 것 이었습니다. 처음에 카켈리안은 도나투스 교회 지도자들을 매수하려고 했으나, 아무 성과도 없었습니다. 그 들은 황제가 내린 명령에 대항하여 그 뇌물을 무시하고 이를 공개했습니다. 카켈리안은 ‘백정보다 잔인하고 폭군보다도 악랄한 자’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 숭배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카톨릭’ 이라는 칭호를 채택한 로마 교회에서는 도나투스파 들 에게 하나로 합치자고 호소를 했습니다. 이 호소는 아무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도나투스는 자기 교회들을 카켈리안에게 넘기기를 거부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로마 군대가 행동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 당했고. 죽은 자들을 우물에 집어 던졌으며, 주교들은 교회에서 살해당했습니다. 그러나 도나투스파의 생존자들은 확고부동하게 대항하여 이전보다 더 그 활동이 강대해졌습니다. 자기들의 교회를 ‘순교자들의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이 일로 도나투스 교회와 카톨릭 교회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이교도 관리와 군대와 연합하여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톨릭교도를 교회 분리자라 부르고, 그들 교회를 ‘증오 받은 우상숭배 장소’와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뛰어난 행정가였던 콘스탄티누스는 무력으로 종교 화합과 일치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무위로 돌아간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신중함이 용맹보다 낫다는 결론을 짓고 북아프리카 지역 주민들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과 그 결과가 저 유명한 니케아 공회의(Council of Nicea)를 소집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서서히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아리우스의 이야기로 돌아가기 전에, 이슬람이 오기 전 까지 도나투스파에 대해 간단하게 역사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이 흥미로울 것 입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관심을 돌리자, 도나투스파에 대한 박해가 상당히 감소하였으며, 그 들 수는 다시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황제가 서기 330년 북아프리카에 카톨릭 교인들을 위해 교회를 지어주었으나, 도나투스파가 매우 강대하여 이 교회를 빼앗겼습니다. 황제는 격분하였으나, 카톨릭 교인들을 위해 다른 교회를 지어 주겠다는 약속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도나투스파의 운동은 심지어 로마에까지 퍼져갔습니다. 이들 역시 로마에 주교를 두었으나, 카르타고와 니코메디아(Nicomedia) 주교보다는 낮은 지위로 생각되었습니다.

 

도나투스는 카르타고에서 주권을 얻어냈습니다.

 

 

 

대중들은 그를 남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생각 했지만 그를 주교라고 결코 부르지는 않았고, ‘카르타고의 도나투스’라고 불렀습니다. 도나투스파가 그에 대한 모독을 예수에 대한 모독보다 더 강하게 반발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불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많은 카톨릭교 도 들이 도나투스에 관해 말 할 때면, 매우 강하고 불친절한 말을 쓴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통치가 끝나자, 도나투스파는 자체 교회로 독립하기 위해 계속 활동하였으며, 종교 일에 황제나 그 관리들이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파는 편협한 분파가 아니었으니, 이들의 수가 카톨릭교도보다 더 많을 적에도 그들을 억압하지 않은 사실을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 서 는 아량을 언제나 요구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제국 군대가 이 두려움 모르는 도나투스파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자 이들에 대해서는 아량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나투스파는 이처럼 계속된 박해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들의 방법을 바꾸려는 로마 황제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카톨릭교도 들은 세속적인 왕과 손잡고 일하는 사악한 사제들이며, 황제의 선호에 의존하여 그리스도를 버렸다.” 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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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투스 사망 이후에도 북 아프리카 인 들은 계속해서 그를 본보기로 삼아 따랐으며, 향후 300년 동안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그래도 따랐습니다.

 

이슬람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 자신들이 따랐던 인도를 확장한 것이요, 재확인으로 이를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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