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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사상적 자유

 

어느 토론회에서 저는 이런 말을 었습니다. “당신은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내가 “어째서죠?”라고 묻자, 그는 나에게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습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네, 믿습니다.” 하자 “그렇다면 당신은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제가 자유사상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요?”

“당신은 결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리석은 말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누가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것은 자연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끝이 없는 비밀스러운 힘이지만 감각기관에 의해서 인지할 수 있는 대상을 가집니다.”

이 말에 대해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슬람과 사상적 자유

이슬람과 사상적 자유

“당신이 한 말은 내가 또 다른 미지의 힘을 믿기 위하여 내가 어느 미지의 힘을 믿는 것을 막는다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러나 의문점은 왜 자연이라는 허위의 신은 나의 부름에 대답하지도 않고 나를 편안하게 해주지도 않는데 내가 평화와 평정, 그리고 안락함을 찾게 해 준 나의 신을 또 다른 미지의 허위의 신을 위해 버려야 하느냐는 것에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것은 사고 자유에 대해 말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실례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고 자유란 신을 버리는 자유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고 자유가 아니라 무 신앙에 관한 자유입니다.

이런 전제를 시작으로 그들은 이슬람이 단지 무 신앙을 금한다는 이유 때문에 사고 자유를 제한한다면서 비난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고 자유와 무 신앙 자유는 같은 개념인가, 무 신앙이 정말 사고 자유에 필요한 필수조건인가 하는 것입니다.

유럽 자유주의 역사의 그릇된 인도로서 그들에게는 유럽에서 어떤 부분적 환경에서만 무신론의 유포가 필요한 것일 뿐 세계 모든 지역에서는 똑 같지 않노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유럽 교회로 대표되는 기독교가 과학을 억압하고 과학자를 괴롭히며, 짜맞추어놓은 거짓을 그냥 지나치고 신의 말이라는 이름 아래 미신이 유럽의 자유사상가들을 무신론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유럽 지식인들은 신에 대한 천성적인 믿음이나 이론적이고도 실제적인 과학적 사실에 대한 믿음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태도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합니다.

유럽 지식인들은 본능적으로 이 궁지로부터 부분적 도피처를 찾아냈습니다.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교회이름을 빌어 우리를 노예화하고 부당한 요구를 강요했으니 독재와 미신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당신들의 신을 도로 가져가시오. 당신들의 신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수도자와 은둔자들의 금욕적인 생활로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노예화하는 교회도 갖지 않을 것 이며 당신들의 신이 한 것 같은 어떠한 도덕적, 지적, 유물론적인 강요도 하지 않는 새로운 신을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인간을 무신론으로 이끄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당황하게 하거나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신 만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그분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창조 하셨으니 모든 것은 그분에게로 돌아 갈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주의자나 무신론자까지도 반박하거나,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하고 분명한 개념입니다.

이슬람에는 유럽인들 교회가 가졌던 것 같은 성직제도가 없습니다. 종교는 모두에게 공동 재산이며 모든 무슬림은 육체적, 정신적, 지적 여건이 허락하는 만큼 종교로부터 어떤 혜택이라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자기생활에서 한 행동에 따른 대가를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란 엔지니어이건 선생님이건, 노동자건 장사꾼이건 간에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종교란 이렇게 많은 직업 중 하나가 아닙니다. 이슬람에는 직업적 성직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조차도 성직자 중재 없이 행해집니다.

그러나 법률학과 공공질서가 필요로 할 때에는 법을 전공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때 이슬람 법률과 헌법을 연구하는 전문가의 지위는 다른 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권위라든지 명성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법률학자며 국가에 대한 조언자일 따름입니다.

이런 점에서, 「알 아즈하르」가 종교적 집단이기는 하지만 성직자들이 가졌던, 사람을 괴롭히는 권력은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증명 할 수가 있습니다. 「알 아즈하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개개인의 종교에 대한 이해를 돕고 비판하는 것뿐 입니다. 반면 외부로부터 온 사람이라도 누구든지 「알 아즈하르」에 도전하고 비판을 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독점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직업에 관계없이 단지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는 종교문제에 있어서 권위자로 여겨질 뿐입니다.

이슬람 계율이 세워졌을 때 이슬람 학자들이 자동적으로 정치가나 성직자, 사무국장 등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변화 한 것이라면 단지 규율근거를 이슬람법에 적용한다는 것뿐 이었습니다. 엔지니어는 여전히 해 오던 일을 했으며 의사 역시 의학적인 일을 했으며 경제학자들은 이슬람의 경제가 나타내는 상황변화만으로 그 사회 경제생활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역사에는 이슬람 신앙심과 그 규율체계가 과학이 과학적용과 충돌 한 적이 없노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어떤 과학자라도 새로운 과학적인 사실을 발견했거나 발표했다고 해서 화형에 처해진다든지 고문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진정한 과학이란 이슬람 신앙심과 충돌하지를 않았으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끔 했습니다.

이슬람은 사람들에게 우주와 지구에 대해 연구할 것과 신 존재를 규명하기 위하여 그들 창조력을 집중할 것을 원합니다. 신앙심 없는 많은 과학자들이 적절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려 노력해 온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슬람은 결코 사람들을 무신론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동양 무신론주의자들은 이전에 그들 식민지 지배자였던 사람들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믿음과 예배를 공격하고 사람들에게 그들 종교를 버리라고 재촉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왜 그런 자유를 원할까요?  

유럽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마음을 미신에서 해방시키고, 압제와 폭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실을 종교공격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슬람적 믿음이 그들에게 필요하거나 극성스럽게 요구하는 모든 자유를 이미 허용했다면, 그들은 왜 그것을 공격해야만 합니까?

이러한 소위 자유사상가들은 사상자유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적 타락과 억제되지 않은 성적무질서에 더욱 더 관심을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 진 사고 자유를 자기 기본적 동기들을 은폐하는 가면으로 사용합니다.

그것은 단지 종교와 도덕에 대한 자신들의 무서운 싸움을 감추려는 위장수단일 뿐입니다. 그들은 이슬람이 자기 사고자유를 제한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그 기본적인 열망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자유사고 옹호자들은 국가가 거대한 힘을 갖기에 이슬람적 규율체계가 독재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 중 최악의 것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신앙이라는 이름을 빌어 국가가 막대한 힘과 권력을 만끽한다는 점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이 자신들을 무모하게 그 포악한 규율에 복종시킨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해서 이 거대한 힘은 독재를 가져오고 평민들은 스스로 생각 할 권리도 없이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사고 자유는 영원히 소멸된다 주장합니다. 지배자에게 도전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이렇게 하는 사람은 종교와 신에 대한 반역이라고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잘못 된 비난은 성 꾸란 구절들로서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1. 인민 정부는 상담역으로서 인민들 가운데 있느니라.
  2. 너희가 사람들 사이에서 판단을 내릴 때에는, 공평하게 해야 하느니라.〔성. 꾸란 4:58〕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 는 “내가 하나님과 그분 전언자에게 복종하는 한 나에게 복종하시오. 그러나 만약 내가 하나님이나 전언자에게 불복종한다면 나는 너희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설교 중 우마르 는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에게 어떤 부정한 점이라도 발견한다면 나를 올바르게 이끌어 주십시오.”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힘으로서 어떤 부정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 칼로서 옳게 만들겠소.”

억압이나 폭정이 종교 이름으로서 행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억압이 몇몇 나라에서, 아직까지도 종교이름을 빌어 행해지고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종교가 독재자들이 쓰는 가면에 불과할 뿐입니까? 히틀러가 종교 이름을 빌어 국가를 지배했습니까? 지금은 심지어 러시아에서까지 스탈린이 경찰국가를 다스린 폭군이며 독재자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탈린이 종교의 이름으로 통치했습니까? 모택동, 프랑코, 남아프리카의 말론, 중국의 장개석을 포함한 모든 폭군과 독재자가 종교를 대신해서 지배했습니까? 종교 지배를 제거하려는 20세기에는 종교라는 가장 신성한 이름으로 인류를 사로잡아 기만하는 가장 무서운 독재를 목격했음이 분명합니다.

독재를 방어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유로운 지성과 양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야망을 감추기 위한 가면으로, 고상한 원칙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자유 이름으로 저질러진 가장 무서운 범죄를 여러분은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유에 대항 해 싸우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수백만 죄 없는 사람들이 법률이라는 이름 아래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살해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법률을 무효화해야만 합니까? 억압과 폭정이 종교 이름으로 몇몇 나라를 지배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종교를 버려야만 합니까? 만약 종교가 억압과 부정을 옹호하려 했다면 모든 종교를 버려야 옳습니까? 이것은 무슬림들 사이에서뿐 만 아니라 무슬림이 그들 적 사이에서도 순수한 정의와 공평을 이룩한 이슬람에 대해서는 더욱 더 적용할 수 없습니다.

이슬람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종교로 보호받고 안전하게 인도될 자유를 존중하라는 가르침으로써 폭정에 대항합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지배자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 법적 힘 한계에 묶어둘 것입니다.

이슬람만큼 정의를 내세우고 폭정에 반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슬람은 사람들에게 만약 통치자가 부당할 때는 바로잡는 게 정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언자 는, “어떠한 악을 목격했을 때 그것에 도전해야만 하느니라. 부정한 통치자에게 정의를 말하는 것이 가장 성스러운 싸움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3대 칼리프인 「오스만」이 정통 길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이러한 원칙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비록 그 반란 자체가 더 큰 탈선을 가져오긴 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진보주의적 자유사상가들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습니다. 진정 자유를 추진하는 길 이라면 종교포기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부정을 혐오하고 그릇된 것을 교정하는 혁명적인 사상을 주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바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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