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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서보는 삼위일체론-1

삼위일체론 자들은 아리우스 나 다른 일신교도 들을 기독교에서 배제시키면, 기독교인이 누구인지 규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분파를 구분 짓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신앙이 복음서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 하는 ‘아들’이란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아리우스 파 에서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성경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논리대로라면, 모든 피조물의 신성을 또한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자 바울 교회의 주교들은 예수만이 ‘하나님 아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 본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말이 성경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 구별에 대하여 모든 정통 교인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그런 시도는 기독교인을 단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분열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삼위일체론 자 들은 낙담한 채 “예수는 진정한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이미지이다.”라고 성경에서 언급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또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이미지요 영광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고 아리우스 파는 반박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논의대로라면 예수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신성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논쟁은 회의실에서뿐만 아니라 궁궐 내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여왕 어머니 헬레나(Helena)는 바울 교회를 지지했습니다. 그 여자는 정치적 인물이었으며, 타고난 행정 수완가 였습니다. 반면에 황제의 누이 콘스탄티나는 신의 유일성을 신봉하였고, 아리우스를 지지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아리우스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를 혐오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였습니다.

 

논쟁은 궁궐 어디에서나 벌어졌습니다. 공의회로 시작한 것이 궁궐의 음모로 발전하여, 궁궐의 환관이나 요리사까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전략가인 황제는 두 파벌로부터 초연한 채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짐작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교도인 그는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그가 갖는 가장 유리한 강점이었습니다.

 

 

 

논쟁이 계속됨에 따라, 공회의 석 상에서 분명한 결론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양측에 모두 자명해졌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황제 지지를 기대하였는데, 바울 교회로서는 세력의 증대를 위해서였고, 북아프리카 교회로서는 박해의 종식을 위해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후원을 받기 위해 참석한 모든 주교들이 종교상에 약간의 변화를 용납하였습니다.

 

 

 

콘스탄티나 공주는 황제가 단합한 교회를 매우 바라고 있는데 분열된 교회가 제국을 위협하기 때문이라고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충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교회 안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그는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에 대한 지지를 모두 철회할지도 몰랐습니다.

 

 

 

만약 이런 조치를 취할 경우 기독교인들은 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할 것이고, 그 가르침 자체가 더 위험에 처할 것이었습니다.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은 유세비우스와 차례로 협의한 뒤에 소극적 자세를 취하였으며, 공의회에서 합의한 다음 변경 사항을 멀리하였습니다.

 

 

 

즉 로마의 태양신 숭배가 당시만 해도 제국 전역에 걸쳐 널리 만연되어 있었고, 황제를 지상에 나타난 태양신의 화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바울 교회에서는:

 

– 로마 태양의 날을 기독교 안식일로 선포했으며:

 

– 태양신의 전설 적 탄생일인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채택했으며:

 

– 태양신의 상징인 빛의 십자가를 기독교의 상징으로 삼았으며:

 

– 태양신의 탄생일 축제 행사의식을 자기들 의식으로 도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와 황제의 종교 사이에 존재했던 격차가 그처럼 상당히 줄어든 것을 보고 매우 흡족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그를 존경하였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한 때 현저하게 약화된 교회에 대한 그의 지지가 이제는 더욱 더 확고해졌습니다.

 

 

 

마침내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의 기본 신조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단계에서 그 지지자들 중에는 아직도 신의 유일성을 직접 체험하고 단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삼위일체 교리가 자기들이 목격한 것을 기술하려는 데에 이용하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예수가 사용했던 유일성이란 말이 이제는 분실되었으므로, 그들은 비록 그 목적에 실제로 적합하지는 않지만 자기들이 아는 모든 것을 나타낼 수 있는 신 플라톤의 철학 용어를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극소수만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극소수 신앙인만이 이해하고 보통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고상한 플라톤 식 교리를 묵인하였다.”라고 아플레이우스(Apuleius)가 언급했습니다.

 

 

 

플라톤(Plato)은 “창조주는 깨닫기에도 어렵지만, 일반 대중에게 이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온전치 못하다. 마찬가지로 거짓을 말하는 것도 위험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의 유일성을 나타내려는 몇몇 사람들이 그런 용어 사용을 정당화하였지만, 사실 그 시도는 실패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계시의 메시지에 전혀 바탕을 두지 않은, 그리스 ‘신들’에 대한 개념이 예수에게 계시한 뛰어난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이런 결합이 처음부터 가능한 것처럼 보인 것은 바로 바울과 그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혁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 철학가들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혼동만이 가중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접한 대다수 대중들도 마찬가지 경우였습니다. 그들은 혼동에 빠졌고, 끝없는 추측만이 무성했습니다. 공회의 자체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낸 과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교리가 처음에는 비공식으로, 그런 다음에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으로, 어떻게 등장하였고, 왜 인정받았는지 이해할만합니다. 그 교리가 낳은 혼동 때문에 아리우스가 예언자 예수가 받은 계시에서 유래하지 않은 그리스 철학가들의 사상에 의존하기보다는 기독교 원전을 인도서로 삼아야 한다고 왜 주장했는지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일단 이런 변경을 니케아 공의회에서 보장받은 뒤에 다음 단계로 예수의 가르침에서 멀어질 수 있었고, 오늘날 니케아 신조로 알려진 것이 작성되어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 제출된 서류에 첨부되었습니다. 삼위일체론 자 들의 견해를 소중히 여겨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은 저주를 덧붙였습니다:

 

 

 

“그런 “그분이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고,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무에서 유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이나,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다른 실체나 본질이라느니 창조되었다느니 변하기 마련이라느니 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자들은 카톨릭 교회가 저주하는 자들이다.”

 

 

 

이 신조에 서명한 사람들 중에는 이를 믿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서명한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공의회에 참석한 대다수 대표들은 삼위일체 교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황제를 기쁘게 해주려는 심정에 조건부로 서명하였습니다.

 

“영혼은 적은 양의 잉크에 거리낄 게 없다.”라고 한 참석자는 말했습니다. 이런 언급에 관해 과트킨(Gwatkin) 교수는 이것이 역사가에게 즐거운 장면은 못 된다고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 교수가 역사가로서 보다는 하찮은 사건의 변론 소송을 맡은 변호사로서 저술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이교도 황제 밑에서 정통 기독교인에 대한 시험을 결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아리우스 편만큼 삼위일체론 자들 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보편화된 시험에 대한 생각은 혁명적인 변화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리우스 파가 단호하게 비난하기에는 아직은 매우 신중해야 할 단계였으며, 심지어 그 신조를 증언하는 자들도 그렇게 염려했습니다. 성경에서도 볼 수 없고 예수나 그분 교우들의 근거도 없이 그 용어를 지지한다고 서명하고 나서 그들은 협박을 받아 서명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팡파르로 시작한 공의회는 사실상 어떤 일도 이루지 못한 채 완전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오직 황제만이 자기 행동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확신에 입각하지 않은 신조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신을 믿을 수는 있어도 민주적 방법으로 선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주교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그 신조에 서명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교들로 하여금 확신도 없이 강제로 서명하게 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따라서 공의회의 결정을 확언하고 지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기적에 호소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즉 복음서들-예수의 가르침을 적은 기록서들-의 더미를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방 한 가운데에 놓아두는 것 이었습니다. 한 출처에 따르면, 이때 당시에 복음서가 적어도 270종이 있었다고 하고, 4,000종 이상이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기록을 인정한다면, 그 수는 당시 글을 아는 기록인 에게 거의 압도적이었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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