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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에 대한 생각-1편

1991년 터기 여성들이 히잡으로 회귀하는 방송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아직도 문화에 의해 세뇌를 당하는 여성들이 가엽게만 여겨졌습니다. 많은 서양인들처럼 나 또한 이슬람은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으며, 히잡이야 말로 그들을 억압하는 상징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4년 후 상점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억압받고 있던 여성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때 내 스스로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사과정 중에 시작했던 4년간의 영적 여행은 무슬림으로 개종 함으로서 마무리 되었고 이 여정은 이슬람에 대한 증오로 출발하여 존경과 관심 그리고 수용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여자로서 히잡은 자연스럽게도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슬람의 신학적 근간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관습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고, 문화적 전통인 히잡은 무슬림 여성들이 충분히 노력하여 타파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꾸란 구절들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가리도록 지시하신 것을 믿는 많은 무슬림들을 보았고 내가 보기에도 꾸란 구절들이 분명히 이것을 지시하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착잡한 감정과 함께 무슬림 여성들에 대한 연민이 들었습니다. 꾸란 구절이 보다 명확했더라면 히잡이 무슬림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 입니다.

 

우선 나는 무슬림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히잡 문제는 잠시 뒤로 미뤄야 했습니다. 나의 최종 분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종교의 근본적인 신학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 분의 선지자입니다. 수년간의 연구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1994년 7월, 박사과정이 1년 반 정도 지났을 무렵 최종적으로 무슬림이 되기로 결심하였을 때 히잡을 착용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는 계명이며 따라야 하는 것 입니다. 학과 사람들에게 내가 무슬림이 되었고 다음에 만날 때는 히잡을 착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다소 충격을 받은 듯 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소문이 퍼지더니 새로운 옷차림의 여성을 보면서 다소 적대적으로 대우받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강인하고 열성적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내가 어떻게 억압적인 관습을 수용할 수 있었을까? 하마스가 한 일이나 일부 무슬림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한 일들을 마치 들어본 적 없다는 듯이 이슬람을 수용할 수 있을까? 이러한 반감들을 잘 준비하지 못했고 내 주변사람들과, 공무원, 지하철 행인 등 모두에게 다르게 대우받는 것들도 준비가 되지 못했었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은 똑같았지만 종종 경멸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중산층 백인 여성으로서 이전에 받던 대우를 전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경험한 차별이었으며 이전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우월적인 나의 지위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 것 이었습니다.

 

나의 새로운 종교와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반응들을 타결해 나가면서 주변에 개종하거나 기존 무슬림인 여성들이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내가 궁금해 하는 상황들을 무슬림 여성 친구들은 어떻게 극복했던 것일까? 그들도 토론토市 한 복판에서 히잡을 착용하고 서 있던 경험을 나처럼 했었을까? 아니면 내가 너무 지나치게 예민했던 것일까? 시민들은 정말 지하철을 쳐다본 것 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왜 내가 경멸과 가련한 대상으로 대우 받았어야 했던 것일까? 박사논문 주제를 결정해야 하는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이러한 생각들을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히잡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야 말로 탐구의 가치가 있는 주제로 명확하게 다가왔습니다. 왜 ‘히잡’은 서구사람들에게 억압의 상징이 되었는가? 왜 서구가 이슬람을 비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어떻게 나와 내 친구들은 무언가에 헌신을 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라고 느끼면서도 주변 비 무슬림 사회와는 충돌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우리 무슬림들이 생각하는 형태의 히잡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이 내용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위한 여정의 산물입니다. ‘히잡의 신비’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히잡을 억압의 상징으로 바라보는 서구인들의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타개하는 것 입니다.

 

내 주장은 히잡이 무슬림 여성들의 억압의 상징이라는 서구의 일반적인 개념은 만들어진 이미지이며 히잡을 착용하는 모든 이 들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항상 서방의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으며 20세기 말까지도 지속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주장컨대, 히잡이 억압적이라는 판단은 ‘자유’와 ‘평등’의 자유로운 이해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히잡 착용의 고찰에 대해 보다 긍정적인 접근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의 ‘평등’과 ‘자유’를 억제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첫 번째 장

식민통치 시대의 히잡

 

어느 시점부터 서구사회에서 히잡이 억압의 상징이 되었을까? 이 의문점에 대한 명확한 시작점을 집어내지는 못했지만 확실한 점은 18세기 유럽인들의 눈에 히잡은 이미 억압적인 무슬림에 대한 관심으로서 비춰지고 있었습니다. 1717부터 1718년간 외교관을 지낸 남편 웨드워드 워틀리 몬타규경을 따라 터키로 여행을 했던 영국 귀부인 메리 워틀리 몬타규 부인은 히잡이 억압적인 관심이라는 의식에 반박했습니다.

 

터키에 머무는 동안 히잡을 착용했던 부인은 히잡이 여성들을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외출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히잡은 여성들에게 억압이 아닌 자유를 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잡이 억압적이라는 인식은 19세기 유럽의 중동 식민지 시대에 접어들며 보다 새롭고 중대한 의미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흐마드가 자신의 저서에서 보여주듯 유럽 식민지배자들은 여성의 지위에 집중된 새로운 시선을 자신들의 중동 식민화에 적극 이용하였습니다.

 

식민지배 시대 당시 유럽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직접적인 식민 통치자, 여행자, 예술가, 선교사, 지식인, 정치인, 여성인권운동가 등 모두가 무슬림 여성들은 그들의 문화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는 신념을 고수하였습니다.

히잡 착용은 무슬림 여성들이 마주한 억압요소 항목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일부다처제, 여성격리, 남성위주의 이혼문화 등) 냉정하게 말하면, 히잡은 땅에 떨어진 여성의 지위에 대한 줄임 말이자 당시 유럽의 학자들이 내놓은 동양학자의 관점에 근거한 중동에 대한 유럽의 문화적 우월주의 신념을 비유적으로 합리화 시키는 도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히잡이 중동사회의 강압과 억압을 대변한다는 의견에는 비단 서구 세계만 동의한 것이 아닙니다. 중동 사회의 소위 ‘엘리트’들 또한 자신들의 문화를 바라보는 동양학자적 시각을 수용하고 고수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뒤 쳐져 있으며 중동 여성들의 지위는 땅에 떨어져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진단 및 해법을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트들 사이에선 히잡을 벗는 것이 서구의 발전된 문화의 격차를 좁힐 수 있는 방법으로써 주요 관심사로 부각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히잡의 착용 여부는 국가 발전과 쇠퇴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한, 현대화를 추진하는 세력이 상류층이었던 만큼 반대파들의 히잡 착용 논의들은 히잡과 히잡의 전통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들(경건/부유함/지위 등의 상징)에 애착을 가진 계층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였습니다.

 

히잡 반대에 관한 논의는 한 국가에서 국민간의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서구 중심적인 엘리트들과 식민지배 및 통치, 그리고 그들의 문화에 적응하여 식민통치로부터 사회적,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계층이 한 축을 이루는가 하면, 간극의 반대편에는 전통 무슬림 학자들 및 피지배층 등 제국주의로부터 고통 받고 ‘서양식’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히잡이 억압적이라는 주장은 지배로부터 나왔거나 최소한 서양의 지배의도로부터 나왔습니다. 히잡이 무슬림 여성들의 억압을 대변한다는 여느 주장들은 좋든 그렇지 않든 히잡에 관한 서구의 동양학자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담론에 기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잡에 관한 여러 토론들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양상을 띠곤 했습니다.

 

아흐마드 주장과 같이 히잡은 제국주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동양학자적 관점이 담긴 짐을 운반해왔습니다. 오늘 날 이슬람 세계에서의 히잡에 관한 논란들은 위와 같은 제국주의 시절에 계층 및 문화적 분단의 존재를 시사합니다.

 

근대의 형의상학

만약 히잡이 1700년대부터 서양인들의 눈에 억압적인 도구로 보였다면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히잡에 대한 높아진 관심의 원인은 무엇인가?

 

나는 히잡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로써 눈빛을 차단하는 히잡의 특성을 꼽습니다. 이에 대한 여타 논의는 근대 제국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까지도 계속 돼 지며 현재 히잡을 공격하는 세력들의 주장을 설명 해 줍니다. 나의 분석은 이집트 식민화 과정에서 터모시 미첼이 주장한 동서양 근대 역학관계의 만남 즉, 개인이 자신을 이 세계 밖에서의 관찰자로 느껴지는 상태에서 (세상이 전시회인 것처럼)물적 세상을 하나의 사진 또는 그림으로 이해하고 바라보는 서양과 물적 세상을 사진 또는 그림으로 해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던 비 유럽 세계의 만남에서 더 나아가는 주장입니다.

 

시선과 히잡

세상을 마치 전시회를 보는 듯이 여기는 근대적 시각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보이는 것에 대한 우선관념입니다.

 

1851년 타임즈에는 만국박람회 이후로 “비로서 우리는 객관적인 인류가 되었다.”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우리는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유리상자 안에 넣고 관찰하고 싶어 한다.”미첼은 이것이야말로 ‘객관성’에 대한 근대적 경험이라 설명합니다. 세상을 발아래 두고 중립적인 곳에서 관찰하는 느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객관성에 대한 시선이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면 어떠한가? 이러한 관점은 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시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슬림들은 자신들을 관찰의 대상으로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제국주의 시절 중동에 도착한 유럽인의 앞에 놓은 여성들이 히잡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환경이 그들을 얼마나 답답하게 만들었는지 짐작할 만 합니다. 이 여성들은 자신들을 관찰의 대상으로 전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는 집이 관찰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고(바깥쪽 창에는 가림 막이 있었습니다.) 남녀가 차별된 공간에서 차별된 생활을 하였기에 더 더욱 그랬습니다.

 

히잡을 쓴 여성은 세상 전시회적 관점의 모든 것을 어긴 것 이였습니다. 그들은 보이지를 않았고, 보이지 않았지만 볼 수가 있었고 관찰하거나 해독할 수 있는 사진이나 또는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타지인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보이고 싶지 않은 신비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바로 이점이 유럽의 시각에서 히잡에 대한 반감을 키운 결정적 요인이라 보여집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문명 정상에 있다는 자부심과 신념을 가지고 중동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중동에 도착함과 동시에 위협 받았습니다. 어떻게 정확이 알 수 없는(보이지 않고 그림으로도 담을 수 없는) ‘미확인 생물체’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거나 그들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보이지 않는 것은 통제될 수 없었으며, 유럽인들은 자신들은 볼 수 없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불편한 감정을 자아냈습니다.

 

이 점은 중동 여성들로 하여금 유럽인들에 대해 우월한 힘을 갖게 하였습니다. 예상과는 정반대되는 상하관계의 전개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유럽인들은 이러한 전개에 분개하며 히잡을 공격하였고 찢으려 하였습니다.

여성들을 들춰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림이나 사진 속의 중동 여성을 나체 또는 옷을 벗겨내어 들춰내려 하였습니다. 이로써 ‘무슬림 여성 히잡 벗기기’ 캠페인은 그 막을 열었습니다.

 

결론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구조간의 차이가 이를 대변하는 ‘근대 형이상학’이 유럽인들로 하여금 중동 여성들의 히잡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히잡은 유럽인들의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 비전, 즉 동양문명에 대한 유럽문명의 타고난 우월함과 그 우월함을 바탕으로 동양을 문명화 시켜야 하는 필요성에 대한 정보를 저해하고 방해하는 존재였습니다.

 

정복시기의 담론은 서양 우월주의에 관한 생각들과 여성의 지위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여 피정복자들에 관한 담론에 중요한 발전단계로써 역할을 했습니다. 중동의 엘리트들은 히잡 착용 등과 같은 특정 관심에 대한 유럽식 이해를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신앙의 상표 또는 부나 지위의 상징으로 통용되던 히잡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들에 더해 히잡이 억압과 퇴보의 상징이라는 견해가 추가되었고 이로 인해 서구화된 소수 엘리트와 비 서구화된 다수 일반계층간의 분열이 증가되었습니다.

 

아흐마드가 말한 것처럼 히잡에 관한 담론은 제국주의 강탈 역사와 이를 둘러싼 계급투쟁 및 대항의 역사로 얼룩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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