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의인화 – 3

Originally posted 2020-02-12 11:58:56.

꾸란 인식체계에 내재한 신성한 통일성은 인류 보편의 통일성을 보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세 종교 모두 이러한 신 개념을 열망해왔지만, 히브리 성서와 신약성서는 이에 합치되지 않았습니다. 신을 표현할 때, 육체적이고 의인화된 측면을 걸러내야 종교가 바로 설 수 있으며, 세 종교가 바라던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단순 명료하고 위대한 신성 개념의 도움으로 소외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은 간격을 메울 수 있고, 과학과 신앙 사이 간격 역시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좁힐 수는 있습니다.

오늘 날 철학과 과학이 신을 향한 믿음으로 가는 길을 연다는 말이 허황된 것 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아리조나 주립 대학 소속 물리학자 이자 천문학자 폴 찰스 윌리엄 데이비스 Paul Charles William Davies(1946년~)는 우주에 목적이나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대해 강력히 반대합니다.

데이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비록 많은 형이상학 이론과 유신론이 억지스럽고 유치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가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한다는 생각보다는 일리가 있다. …… 우리의 존재에는 이유가 있다.”

 

데이비스는 신을 유치하게 인간의 모습으로 상상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 대신 신은 초월적 보편 정신, 최고의 총체적 개념, 존재 그 자체, 창조의 힘, 심지어 수학 원리 등으로 생각 해 보라고 권합니다. 시공을 초월하고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신만이 자연 현상에 진정한 의미와 정합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여기에서 종교가 과학자의 신성 개념을 따라야 한다거나 계시가 과학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필자가 강조하려는 바는 조악한 의인화나 신체주의 신 개념이야 말로 현대의 지성과 하나님에 향한 신앙 사이에 놓인 장애물이라는 것 입니다.

 

의인화 개념은 좋게 말 하더라도 종교와 신의 권위를 약화시켰고, 나쁘게 말한다면 종교를 말살했습니다. 인류 지성은 인간인 신 혹은 인간처럼 보이는 신을 인정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숭배하는 대상은 적어도 인간이 통제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우주보다 더 위대한 무엇이어야 만 합니다. 어쩌면 의인화한 신의 모습이야 말로 현대 무신론의 핵심 요소 중 하나 일 것 입니다. 종교 의식과 지성적 사고 사이 간극은 초월적 신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상당히 좁힐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의 어려움은 신앙 자체보다는 의인화된 신 개념 때문이며, 이는 인간의 지성에 대한 호소력이 전혀 없어서, 생동감이나 초월이 없는 유약한 모습으로 비칠 뿐 입니다. 여기에 해결책이 있는데, 바로 꾸란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입니다.

 

꾸란은 하나님의 신성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제시한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권위를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꾸란은 전 세계적으로 초월적 신성과 종교를 부활시키는 데 있어 히브리 성서나 신약성서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꾸란은 신의 개방성, 통일성, 유일성, 초월성을 가장 거룩하고 본연의 의미로 강조하고, 신을 의인화하는 묘사를 일관되게 거부하며, 평범한 보통 사람뿐 아니라 최고의 지성과도 신과 신앙을 두고 대화합니다.

 

복합적 무신론 철학과 종교를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경향을 이겨낸 이슬람 신앙의 활력을 보여주는 증거가 꾸란 입니다. 우주와 우주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장엄하고, 유일하며, 홀로 존재하고, 한 분 이신 하나님으로 복원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 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서기 180년에서 210년까지 ‘아버지’란 말이 ‘전능하신’이란 말 다음에 첨가 되었으며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심하게 논쟁 하였습니다.

빅토르(Victor) 주교와 제피시우스(Zephysius) 주교가 이 행위을 비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경전에 어떤 말을 첨가하거나 삭제하는 것이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신성모독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신으로서 생각하려는 경향에 반대하였습니다. 예수의 본래 가르침에 나타난 하나님의 유일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예수가 선지자로서 주님의 큰 은총을 입었을지라도, 남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노라고 주장했습니다.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에서 발달한 교회에서도 이와 똑같은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면서 다른 문화와 접촉하였으며, 또 집권층과 알력이 생겼습니다. 그 가르침은 다른 문화에 동화하거나 순응하기 시작했는데, 또한 집권층의 박해를 면하기 위해 점점 변질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리스에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언어로 표현되고, 또 그 문화사상과 철학에 제휴하여 변질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리스 식 다신 관념이 삼위일체 교리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주로 타르수스(Tarsus)의 바울(Paul)이 예수를 선지자 위치에서 하나님으로 격상 시켰는데 서기 325년에 와서야 비로소 삼위일체 교리가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심지어 그 당시 이 신조에 서약을 한 사람조차도 그 경전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이를 신봉하지 않았습니다.

이 신조의 아버지쯤으로 여겨지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도 그 근거에 대해 확신을 갖지 않았으며, 이렇게 인정하였다고 전합니다.

“그가 예수의 신성을 심사숙고 하라고 자기의견을 강조 할 때 마다, 자신의 부질없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가 글로서 쓰면 쓸수록, 자기생각을 더욱 더 표현 할 수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심지어 “하나님은 셋이 아니라 한 분 뿐이다.”라고 썼습니다.

그의 삼위일체 신앙은 확신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정책이나 어떤 필요성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결점이 있는 철학 사고에 바탕을 둘 뿐 아니라, 정략에도 그 바탕을 두었음을 당시 니케아 (Nicea) 회의를 주재했던 로마 이교도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가 한 역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성장하는 그리스도교 사회가 자기 제국을 약화시키는 껄끄러운 반대세력이 되자 이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경우 오히려 제국을 강화하는 데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재구성 함으로써 교회 당국의 지지를 얻고, 동시에 그 안에서 발생한 교회내부의 갈등이 제국의 전체 갈등 원인이 되고 있는 혼란을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 목적을 부분적으로 달성한 과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한 사건으로 예증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게 점령을 당해있던 싱가포르에서 무슬림 축제일인 이드(Eid)가 다가왔을 때, 일본 당국에서는 이드 예배를 집중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날은 역사적 행사가 될 것이며 전 세계 무슬림들이 그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이드 예배에 대한 그런 이례적인 강조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 수수께끼는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밝혀졌습니다.

 

일본정부 수뇌, 토조(Tojo)가 이슬람을 현대에 맞게 개조하는 데 큰 역할을 해보려고 계획하였다고 합니다. 이슬람 가르침을 오늘날 필요에 맞게 고치려 한 것 입니다.

그가 보기에 무슬림이 메카를 향하여 예배 드리는 대신, 자기 통치 밑에서 이슬람이 장차 중심지로서 동경을 향해 예배를 드리도록 할 필요성이 있던 겁니다. 무슬림들이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전체 계획이 취소되었지만, 그 결과 그 해에는 싱가포르에서 이드 예배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토조는 이슬람 중요성을 잘 인식하여 제국주의계획 수단으로서 이용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토조가 실패했던 일을 이루었으니 예루살렘 대신 로마가 바울 그리스도교 중심지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가 전한 순수한 가르침을 변질시켜 결국 다 신을 신봉하려는 그리스도교를 용인 한 일이 아무 반대에 부딪히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서기 325년 삼위일체 교리가 정통 그리스도교리로 공식 제안이 되었을 때, 북아프리카 그리스도교 지도자 중 아리우스(Arius)는 콘스탄티누스와 카톨릭 교회 담합에 대항하여 예수께서는 늘 하나님 유일성을 단언 했었노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말썽이 많은 유일신 추종자들을 갖은 잔학성과 폭력을 동원하여 전멸시키도록 명령 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유일신교도로 죽었으나, 결국 삼위일체 교리가 유럽에서 그리스도교 근본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교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혼동에 빠졌으며, 진실이 왜곡 된 채 그대로 믿으라고 강요를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교리를 이성으로서 증명하고 설명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세 가지 사상학파가 발달했었는데.

첫 번째 학파는 4세기에 살았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와 관련 된 것으로, 이 교리를 증명할 수는 없어도 설명할 수는 있노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학파는 12세기에 성 빅토르(St. Victor)와 관련된 것으로서 이 교리를 증명 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설명까지 할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세 번째 학파는 14세기에 삼위일체 교리를 증명 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맹목으로 신봉해야만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비록 예수 가르침이 들어있는 책들이 그 교리에 담긴 터무니 없는 모순을 회피하기 위하여 완전히 훼손당하고 숨겨지었거나 변질되었다 하더라도, 보존해 온 책들 속에 상당한 진리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 신앙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언급한 내용보다 교회 지도층이 언급한 내용들을 더 강조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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