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ly posted 2019-09-21 14:26:14.
다음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진정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을 지키시니, 정녕 하나님께서 배신하는 불신자를 좋아하지 않으시니라.
전쟁을 허락하심은 악행 때문이니, 하나님 도움이시며 강하시도다.
하나님을 주님이라 말한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쫓겨났으니, 사람들 중에 한 무리를 세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무수히 찾는 수도원과 교회와 유대회당과 마스짇이 허물어지리라,
하나님의 도움이 돕는 이들에 있을 것이며 정녕 하나님은 무궁한 힘이로다.
그들이 이 땅에 보내졌을 때, 예배 드리고, 구빈세를 내며, 의를 명하고, 악을 금하나니, 모두의 끝은 하나님께 있도다.” (꾸란 22장 38 – 41절)
하나님께서 이렇게 허락하시자 무슬림은 더 이상 박해나 압제 당하지를 않았습니다. 평온을 다시 찾고 평화와 자유를 회복하며 자기 가족과 재회하고 재산을 되찾기 위해 대항을 했습니다.
무슬림에게서 평화와 자유를 빼앗아 간 악의에 찬 이교도들과 전투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먼저 공격하거나, 집, 농작물, 보급품 등을 파손한다든지, 비 전투원인 아이, 부녀자, 무능력자를 죽이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를 않았습니다.
무슬림은 이들 규정을 지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제한을 벗어나지를 않았는데, 이는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무슬림은 이러한 제약 아래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원칙과 지시 하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글거리는 아라비아 메마른 사막에서 출현하여 로마와 페르시아 속령을 정복하고, 대담하게도 유럽 성벽을 에워쌌던 ‘잔인한’ 무슬림을 다룬 이야기나 기록은 상당히 많습니다.
무슬림은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무력으로 이슬람을 전파하려는 종교적 열망에 따라 움직였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반면, 이슬람은 본질상 강요할 수 없으며, 설령 피정복민에게 이슬람을 강요했더라도 오랫동안 존속할 수 없었을 테고, 정복한 지역에서 비무슬림을 축출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견해를 어리석다고 보는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이슬람은 가는 곳마다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비무슬림 토착민들과 공존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이 강요된다면, 새로운 지역에서 강제로 무슬림이 된 사람들은 신실한 신자가 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패배한 사람들이 훌륭한 무슬림이 되기 위해서는 강요 이상의 것이 필요하며, 이들이 ‘강요된’ 종교를 지지하고 고수하기 위해서는 억압보다도 더 뛰어난 것이 필요합니다.
또 하나, 일부 지식인이나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지닌 사고의 경향이라면 이슬람이 무력으로 전파되었다는 어리석고 순진한 견해로만 만족하지를 않습니다. 이슬람이 팽창한 것을 마치 아라비아 반도 열기와 가뭄으로 질식할 듯 했기 때문에 단순한 경제적인 필요와 사정 때문에 무슬림이 일으킨 침략 전쟁으로 설명합니다.
즉 무슬림들 전쟁과 팽창은 종교적이거나 영적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며,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생긴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랍인이 희생과 헌신에 몸 바칠 만큼 숭고하지 않았거나, 무함마드가 돌아가신 후 남은 사람들이 종교에 아주 흥미를 잃고 당장 눈앞에 욕구만을 채우기 위해 움직였다고 암시하는 듯합니다. 혹은 이슬람 자체가 무슬림 전사 마음속에 열기와 정열을 불어넣을 수 없었노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 ‘지식인’은 이 중 어떤 암시가 가장 유력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 덧붙여 당시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전쟁들을 무슬림 침략이나 약탈 야욕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무슬림이 피에 굶주린 나머지 전리품을 무조건 노린다는 주장 이외와 다른 동기는 모두 외면하고, 이슬람 호소력을 인정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슬람에 대한 미덕을 보지 않은 채 겉모습으로만 평가한다면, 무슬림에게 고상한 동기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한 논쟁은 아주 심각하며, 때로는 학술적 논의 양상을 띠기조차 합니다. 어쨌거나 문제는 이 비판자 중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문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여 정직하게 진실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모두에게 공히 통찰력이 결여되었으며, 일어 난 사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공표할 용기 또한 없었습니다.
언젠가 그들 스스로 수 많은 사람을 오도하여 판단을 그르치게 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엄청난 짐을 진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진실에 반해, 무슬림에 맞서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에게조차 큰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책임감이 얼마나 막중하겠습니까.
여기에서 각 전쟁과 전투에 관한 이슬람적 견해 모두를 상세히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 전체를 올바로 알게 해주는 주요 논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위한 자비 차원에서 임무를 부여한 무함마드는, 인근 지역의 통치자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비를 함께 나누자고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이 통치자들은 무함마드의 정중한 권유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를 조롱하고 무슬림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무함마드의 생전, 로마와 페르시아 군대는 국경을 넘어 여러 번 침략했습니다. 무슬림은 무함마드가 죽을 때까지도 부득이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태가 계속되었던 만큼, 후대에 일어난 일은 모두 최초의 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는 당시 스페인과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가 새로 등장하는 이슬람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는 뜻입니다.
이슬람의 전쟁 역시 이런 상황에 비추어서 보아야 합니다.
한때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가 힘을 합쳐 하나의 세력으로 움직였는데, 이는 로마교황이 그리스도교인에 대해 의심의 여지없는 권위를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중세의 십자군과, 심지어 20세기에도 그리스도교 세력이 이슬람을 상대로 총동원한 병력을 보아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가 이슬람에 대한 전쟁을 승인하자, 무슬림은 어느 전장이든—팔레스타인, 비옥한 초승달 지역, 이탈리아, 헝가리, 그 어디든—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와 페르시아의 막강한 병력이 사방에서 무슬림은 포위했을 때,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무슬림은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무슬림은 앉은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로마는 무함마드의 목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로마가 초기 그리스도교 개척자에게 저질렀던 만행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기의 일부 전쟁은 무슬림이 싸우기는 했지만 이슬람과 관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 전쟁은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지역적인, 어쩌면 개인적이라 할 이유들이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무슬림이 가한 것이건, 당한 것이건 침략은 침략입니다. 이슬람의 전쟁에 대한 태도는 알려진 그대로이며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후에 침략 전쟁이 있었다면 이슬람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용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2. 앞서 말한 비판자 중 누구도 이슬람 발흥초기의 역사적 특성과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대중 소통 매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대인 접촉 없이 홍보하거나 선교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생명이나 재산, 명예 그리고 개인이나 약소국의 협정을 존중하지도 않았습니다.
안전한 치안이나 표현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고귀한 명분을 위해 싸우거나 인기 없는 신념을 입 밖에 내는 자는 생명이 위험했습니다.
이는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그리스도교 개척자들 그리고 초기 무슬림의 기록에서 잘 드러납니다. 통치자들과 총독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명을 띤 많은 특사들은 함흥차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메시지를 받은 자들이 그들을 냉혹하게 살해하거나 가둬버렸습니다.
아라비아의 무슬림은 이 모든 곤경을 딛고,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무슬림은 인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인류를 위해 기여하고, 구원의 신앙을 권해야 했습니다.
꾸란은 “지혜를 다하고, 아름다운 선교를 펴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길에 초대하고, 가장 정중하게 의논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화적인 부름에 기꺼이 귀 기울인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요?
많은 불신자들이 평화적인 설교에 영향 받지 않기 위해 선지자의 말을 듣기조차 피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무력으로 이슬람의 평화적인 초대에 저항했습니다.
일찍이 아라비아에서 겪은 체험을 통해 무슬림은 평화를 견지하면서 동시에 경계태세를 취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평화를 수호할 수 있을 만큼 강할 때 평화롭게 행동할 수 있고, 평화의 소리는 압박에 저항하고 압제를 제거할 수 있을 때 더 잘 울려 퍼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