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ly posted 2019-09-15 06:40:19.
인류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주제라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는 신이었을까요? 아니면 단지 인간에 불과했을까요?
혹은 반신반인이었을까요? 실존했던 인물일까요? 혹 보통 사람처럼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은 아닐까요? 정말 크리스마스 무렵에 태어났을까요?
종교와 관련 없이 이 같은 여러 질문이 끊이지 않고, 이 문제에 관한 논쟁과 토론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이와 관련한 해석 차이로서 다양한 그리스도교 교파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인과 그리스도교인 모두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슬람 입장은 어떨까요? 이슬람이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 생애에서 중요한 내용, 즉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살고 계시를 받았으며 죽어서 매장되었는지, 정말 ‘기적’을 행 했는지, 또 했다면 어떤 기적이었나, 또 정말로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는가,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부활했는가 등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를 않습니다. 지면도 부족하려니와 논의 성격이 모독적이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감이 있기에 이런 세부적인 논의는 하지 않겠습니다.
논의에 앞서 세 가지 점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첫째, 무슬림은 예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이슬람은 예수가 실존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이며 굳건한 신앙을 가졌노라 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 종교, 선지자, 계시, 인간애에 관한 무슬림 인식에 따라 예수를 역사적 사실이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들을 전한 특별한 선지자 중의 한 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슬람 기본신앙이며, 무슬림이라면 결코 예수를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 여기에 언급하는 것은 모두 꾸란을 그 출처로서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이 그리스도교와는 다르지만, 이슬람에는 결코 예수님 역할이나 특성, 위대함을 과소평가하거나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반대로 이슬람은 예수를 매우 존귀한 존재로서 여기며 하나님께서 친히 천거하신,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예수가 태어나서 자라난 당시 환경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예수를 맞이했던 그때 사람들은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들은 취지와 어휘 양면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서를 개필, 왜곡했습니다.
(2) 예수를 비롯한 선지자들 일부는 배척하고 또 일부는 죽였습니다.
(3) 자기재산에 관해 무책임하고 함부로 말했습니다.
꾸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라지 않는 선지자가 왔을 때 마다, 거만함으로 사기꾼이라 불렀으며, 또 살해했도다.” (꾸란 2장 87절)
“하나님께서 들으셨으니, ‘하나님은 가난하고 우리가 더 부유하노라’, 그 말을 적으시고, 부당하게 선지자를 살해한 자를 적으며 말씀하시니, 지옥의 화염 맛을 보이리라.” (꾸란 3장 181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서약을 받아 내시며 …… 저들이 그 서약을 어겼으니, 마음을 닫게 하였거늘, 받은 계시를 바꾸더니 또 잊었도다.” (꾸란 5장 13 – 14절)
예수 탄생과 연대에 관해, 그리스도교인은 그 정확한 연도나 계절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태어난 시기보다 무슬림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예수가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예수 시대 이전까지 이미 세 번의 인간창조가 있었는데, 각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보이신 능력과 지식과 지혜가 명백하게 입증되었습니다.
첫째, 아버지나 어머니의 육체적 개입이나 존재가 없이 창조된 사람으로 아담이 있습니다.
둘째, 어머니나 조상의 육체적 존재 없이 창조된 사람으로 하와가 있었습니다. 아담이 인류의 상징적 아버지 혹은 비유적 아버지라면, 하와는 아버지가 원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 정상적인 관계를 통해 창조된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네 번째 창조, 즉 인간 아버지의 육체적 개입이 없는 인간창조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이, 예수 창조 당시에 하나님께서 현실화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네 번째 창조를 완성하고, 가능한 모든 형태로서 하나님 능력을 예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독실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기적의 작용이었으며, 하나님 의지가 깃든 일이었습니다. 특정시기에 이런 창조를 선택한 것은 흥미롭고 동시에 이해되는 바가 없지를 않습니다. 당시에는 의술이 대중 화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길에서 크게 벗어난데다 매우 고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 방법으로서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보이시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따름으로서만 구원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예수 창조의 생생한 실연(實演)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이는 또한 예수가 후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행하는, 의학적 성격을 띤 기적을 예고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 탄생에 관한 이러한 가정적 해석은 꾸란이나 무함마드 언행록에서 근거한 것이 아님을 밝혀둡니다.
이처럼 논리적으로 가능한 네 가지 유형의 창조와 예수의 탄생이 네 번째이자 최종적인 유형을 이룬다는 귀납적 결론은 개인 의견이자 가정입니다. 이러한 일은 꾸란과 무함마드 언행록에 대한 권위나 진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네 가지 창조에 대한 가정이 타당하든 타당하지 않든, 꾸란 진리와 예수 탄생이 하나님께서 일으킨 기적이고, 쉬운 일이라는 꾸란 언명에 대한 무슬림 믿음에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런 논점은 계속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가, 인간 아버지의 선재(先在) 없이 창조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로 삼으시거나 그 아버지 행세를 했노라고 해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이라 부르고자 한다면, 또 이런 주장이 맞는다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었던 아담에게도 역시 같은 논리가 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라는 용어를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모든 인류 특히 더할 수 없이 높은 주님에 대한 봉사로 이름을 떨친 사람들 모두에게도 같은 의미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뛰어난 피조물입니다. 모든 인간이란 하나님 자녀들이며.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 해 아담을 빼버리고, 비유적 해석에서 나머지 인류를 제외하는 것은 대단히 독단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꾸란은 예수 탄생을 다음과 같이 계시합니다.
“마리아가 가족을 떠나 동쪽으로 간 성서 내용을 기억할지니. 그녀가 장막으로 가림에, 영을 보내어, 그녀 앞에 나타났으니, 남자의 모습이로다.
그녀가 말했으니, ‘나는 자애하신 하나님께로 당신을 피하려 하니, 당신이 경건하다면 다가오지 마시오.’
그가 말하니, ‘아니요, 나는 단지 주님의 전달자로서, 그대에게 티없는 아들을 전해주는 것뿐이오.’
그녀가 말하니, ‘나는 순결하고, 부정한 일이 없으니, 어찌 아들을 가지리오’
그가 말하기를, ‘그대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내게는 쉬운 일이며, 자비로서 그를 인류의 징표로 삼을 것이고, 정해진 일 이노라’ 고 하셨소.’
깨달은 마리아가 그를 따라서 먼 곳으로 떠나노라.
해산이 가까워진 그녀가, 괴로움에 소리지르니, ‘아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차라리 죽었더라면! 눈에 띄지 않게 잊혀져 버렸더라면!’
그때 아래쪽에서 소리가 들리더라, ‘슬퍼하지를 말 것이니, 주님께서 개울을 마련하셨느니라. 야자나무를 흔들면 잘 익은 대추야자가 떨어지리라. 먹고 마시며 두 눈을 식힐 것임에, 한 사내를 볼 것이니.’ 말하라, ‘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단식을 맹세했으니, 오늘부터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를 않으리라.’
그녀가 아기와 함께 그들에게 오자, 저들이 말하도다, ‘오! 마리아여, 이렇게 끔찍한 것을 데려오다니!’
‘오! 아론 누이여, 아버지는 악한 이가 아닐뿐더러, 어머니도 부정하지를 않았노라.’
그녀가 아기를 가리키자, ‘어떻게 요람에 있는 아기와 말할 수 있으리요?’ 하니,
아기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 종복으로서, 계시를 받은 선지자나니.’
‘내가 어디에 있든 축복되게끔 하셨으며, 살아있는 한 예배와 구빈세를 명하셨노라.’
‘어머니에게 상냥하여, 방만하거나 비참해지지 않게끔 하셨으니.’
‘내가 태어나던 날, 죽는 날, 다시 부활하는 날에도 평화 깃들리라.’
바로 마리아의 아들, 예수이니, 저들이 논쟁하는 진실의 전말이로다.
하나님께는 자식이 없으며, 영광이 깃드옵소서!
명령하시니, 있거라 하신다면 생기노라.
진정 하나님께선 나와 그대의 주님이시니, 따를 때에 올바른 길이로다.”(꾸란 19장 16 – 36절)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맡기신 사명이란 피 흘리는 희생을 통해 속죄 함으로서 모두를 구원하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도와 자기 수양으로 침체한 정신에 활기를 불어넣고 굳은 영혼을 풀어 구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교를 정립하고, 곡해와 오용된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만연한 침체정신과 굳어진 영혼에 접근하면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징표를 가져오고 기적을 행 함으로서 자기 사명을 뒷받침했습니다. 당시의 완고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길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은 초자연적이고 비범할 뿐 아니라 논리적이며 영적 증거를 예수를 통해 제시했습니다.
예수 사명과 그가 보인 기적에 관해 꾸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라’ 천사가 말하기를, ‘오! 마리아여, 하나님께서 기쁜 말씀을 보내시니, 그 이름은 메시아, 마리아의 아들 예수로, 현세와 내세에서 영광이 있을 것이오, 내 곁의 사람들과 함께하노라.’
‘어릴 때나 자라서나,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며, 올바른 이와 함께하노라.’
그녀가 말씀 드리니, ‘주님이시여, 저는 남자를 모르는데, 어찌 아들을 갖겠습니까?’
그가 말하니,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시니, 운명을 명하심에, 있거라 하신다면 생기노라.’
그에게 성서와 지혜와 율법과 복음을 가르치시어, 이스라엘 자손 들 선지자로 삼으셨으니,
‘그대 주님이 주신 징표를 가져왔노라, 진흙으로 새를 빚어 숨을 불어넣으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사 새로 살아나고, 장님과 문둥이를 고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사 죽은 이를 살리고, 집에서 먹고 저장하는 음식을 알아 맞추니, 그대가 믿는다면 그 중에 징표가 있으리라.’
‘그대에게 보낸 율법과 성경과 금지되었던 것을 입증하려고 왔으니, 그대 주님에게서 징표로 왔노라, 하나님께 경외 드리고 나를 따르라.’
‘하나님께서 나와 또 그대 주님이시니 경배드릴 것이며, 이것이 바른길이라.’” (꾸란 3장 45 – 51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마리아 아들 예수여! 그대와 어미에게 내린 내 은총을 기억할지니, 보라! 성령을 보내 그대가 어릴 때나 자라서나 사람들에게 말했으며, 보라! 그대에게 성서와 지혜와 율법과 복음을 가르쳤으며, 진흙으로 새를 빚어 숨을 불어넣으니, 내가 허락함에 새로이 살아나고, 장님과 문둥이를 고치며, 내 허락으로 죽은 이를 살렸으니, 보라! 그대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징표를 상기시켰음에도 저들이 해치지 못하게 하였으나 그 중 불신자는 단지 요술에 불과하다고 말하노라.’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니, ‘마리아의 아들 예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 대신 그대와 어미를 경배하도록 말했는가?’ 예수가 고함에, ‘영광을 바치오니, 저에게는 그렇게 말 할 권리가 없습니다,
저들에게 한 말이란 오직…’ … 명 받은 저와 자기들 주님이신 하나님께 경배 드리라는 것 이외에는 한 말이 없었으니, 저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저들이 증인이며, 저를 보호하실 때 저들이 보았으니, 당신께서 저들을 보셨으며, 당신께서 모두 증언을 하십니다.” (꾸란 5장 110 – 117절)
이 구절들은 꾸란 여러 곳에서 산재하는 유사한 구절을 대표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모두, 예수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자처하지를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 역시 그보다 앞서 왔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 종복으로서, 다른 선지자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꾸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 자취를 따라, 마리아 아들 예수를 보냈으며, 토라를 확인하고, 또 성서를 보냈으니, 안내와 빛과 토라를 확인하기 위함이라, 경건한 이를 위한 안내와 훈계로다.” (꾸란 5장 46절)
“‘하나님이 곧 마리아의 아들인 그리스도다’ 말하는 자, 신성모독 이노라,
그리스도가 말했으니, ‘이스라엘의 자손들이여! 나와 그대의 주님 하나님께만 경배 드려야만 하리니, 다 신을 저지른다면 하나님께서 천국을 금하실 테요, 불 지옥을 거처로 보내 시리니, 그 누구도 악한 자들을 도울 수 없노라.’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중 한 분이다’